본문 바로가기
Morning Gallery

Morning Gallery '펠릭스 누스바움' 초현실주의 화가

by 핑쿠여니 2023. 7. 14.
728x90
반응형



Morning Gallery /십만시간의행복

Felix Nussbaum
1904,12월  ~ 1944년 8월

유대계 독일인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누스바움의 작품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로서 한 개인의 정수를 볼 수 있다. 누스바움은 홀로코스트라는 폭력의 잔인함을 그림으로 증언했다.

나치 치하인 1933년에 누스바움은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의 장학금을 받아 로마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해 4월에 정책 선전 관료를 로마에 보냈다. 그는 나치 예술가들이 영웅주의와 아리안 민족을 고취시키고 개발하는 방법을 엘리트 예술가들에게 설명했다. 누스바움은 이때 유대인으로서는 독일의 학업을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1940년에 나치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누스바움은 벨기에 경찰에 ‘적대적 외계인’(hostile alien) 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으며, 프랑스 Saint-Cyprien수용소로 압송되었다. 수용소의 절망적 상황은 당시 그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결국 프랑스가 독일의 송환 요구를 받아들였는데 독일로 가는 기찻길에서 탈출하여 브뤼셀에서 부인과 재회했다. 그 뒤 두 사람은 은신 생활을 시작했는데, 신분 증명서가 없이는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으나, 벗들이 은신처를 제공하고 예술 활동 지원을 해 주어 붓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생애 마지막 4년의 어두움은 당시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1944년은 나치 독일의 계획이 누스바움 일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해이다. 2월에 누스바움의 부모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7월 20일 새벽에 누스바움과 그의 아내가 은신처 더그매(천장과 지붕 사이의 빈 공간)에 숨어 있다가 독일군에 의해 발각되었다. 연합군이 브뤼셀을 해방하기 불과 한 달 전이었으며, 〈죽음의 승리〉를 완성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때였다.[5] 그들은 체포되어 메헬렌 중계 수용소(Mechelen transit camp)에 압송되었으며, 수용수 번호 284번과 285번을 받았다. 7월31일 아우슈비츠행 열차에 실렸는데, 그 열차는 벨기에에서 아우슈비츠로 향했던 마지막 열차였다. 563명이 같은 열차로 이송됐고, 8월 2일에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그중 207명이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독가스로 살육당했다고 전한다. 누스바움이 그 207명 중 한 명이었다. 나머지 형제들도 순차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브뤼셀에서 은신하던 시기에 누스바움은 그의 작품 중 널리 알려진 두 작품을 그렸다. 하나는 〈유대인 신분증을 든 자화상〉(Self Portrait with Jewish Identity Card, 1943)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승리〉(Triumph of Death, 1944)이다. 당시 브뤼셀에 있던 은신처 더그매는 누스바움이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그림을 보기 위해 뒤로 물러나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아 눈 앞에 바짝 대고 그려야 했으며, 거의 정신착란 상태로 작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누스바움은 “내 그림을 발견하면 병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 메시지라고 생각하라”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일기를 남겼다.ㅡ위키백과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