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갤러리/십만시간의행복
김은호 1892~1979.
최근 남원시가 그의 친일경력을 문제삼아 춘향영정을 교체해 다시 주목을 받았다. 임금의 용안을 그린 마지막 어진화가로 명성을 날렸고, 화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단순한 친일 행각을 넘어서 일본미술을 화단에 유포했다.
21세 되던 1912년 여름, 영풍서관(永豊書館) 주인의 부탁으로 고서(古書)를 세필로 베끼고 있는 것이 우연히 중추원 참의였던 김교성(金敎聲)과 장안의 명사 현채(玄采)의 눈에 띄어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김교성의 소개 편지로 당시 백목다리 근처)에 있던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화과에 편입학하여 본격적인 회화수업을 받기 시작하면서 화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당시 서화계에 쌍벽을 이루었던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에서 전통화법을 배웠다. 교수진으로는 정대유 · 강진희 · 김응원 · 강필주, 그리고 조교급으로 이도영이 있었다.
김은호는 제1기로 입학한 오일영 · 이용우에 이어 제2기로 화과에 편입학하여 3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5년에 졸업했다. 이 즈음에 김은호는 '양은(良殷)'이라는 초명 대신 '은호(殷鎬)'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 화풍은 스승인 안중식의 사의적(寫意的) 산수화풍을 충실히 보여주며, 조선 말기 화단을 계승한 연장선상에 있었다. 김은호는 세필의 정교한 묘사력으로 그린 초상화로도 널리 알려졌다.
화과를 졸업한 후 이어서 서과에 다시 편입학하여 1917년에 졸업하면서 서화적 기량을 두루 겸비한 화가로 성장하였다. 김은호의 회고록에 의하면, 1912년 서화미술회에 들어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순종의 어진을 그릴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 때 안중식으로부터 '이당(以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대원수복 차림의 순종어진은 1913년에 완성되었는데, 창덕궁 대조전에 걸렸다가 1917년 11월에 있었던 대화재로 대조전이 전소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한다.
화가로 입문한 초기부터 어진화가로서 주목을 받았으며 처음 순종어진을 제작하는 와중에 천도교의 일파인 시천교(侍天敎)의 교주 김연국(金演局)의 요청으로 교당에 모실 3대 교주의 초상도 그렸다.
교조 최제우(崔濟愚), 2대 최시형(崔時亨), 그리고 김연국 자신의 초상화까지 3점의 초상화는 현재 계룡산 구암(龜菴) 김연국의 문중에 전해지며, 사진처럼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일로 김은호는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고, 어용화사라는 명성을 배경으로 상류 귀족계층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미인화를 비롯한 극채색 인물화로 대중적인 인기도 누릴 수 있었다.
1915년 일제의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약칭 공진회]에 <조선의 가정>이란 작품을 출품해서 포상을 받았다.
이어서 1918년에는 바로 전 해에 훙서한 고종의 조카 이준용(李埈鎔)의 사우(祠宇)에 봉안할 영정을 그렸고, 이지용(李址鎔) 등 귀족들과 함께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며 교류의 폭을 넓혔다.
이 해 말에 첫 부인인 이씨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그 이듬 해에는 기미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천주교인이 찍어낸 독립신문을 배포한 일로 서대문 감옥에 6개월 정도 투옥되었다.
1920년에 서화계의 중진과 신진화가들이 동원되어 새로 중건된 창덕궁 내전의 벽화를 제작한 사업에 참여하여 화려한 채색의 궁중장식화이자 부벽화(付壁畵)인 <백학도(白鶴圖)>를 그렸다.
ㅡ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화가로 입문한 초기부터 어진화가로서 주목을 받았으며 처음 순종어진을 제작하는 와중에 천도교의 일파인 시천교(侍天敎)의 교주 김연국(金演局)의 요청으로 교당에 모실 3대 교주의 초상도 그렸다.
교조 최제우(崔濟愚), 2대 최시형(崔時亨), 그리고 김연국 자신의 초상화까지 3점의 초상화는 현재 계룡산 구암(龜菴) 김연국의 문중에 전해지며, 사진처럼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일로 김은호는 오랜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고, 어용화사라는 명성을 배경으로 상류 귀족계층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미인화를 비롯한 극채색 인물화로 대중적인 인기도 누릴 수 있었다.
1915년 일제의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약칭 공진회]에 <조선의 가정>이란 작품을 출품해서 포상을 받았다.
이어서 1918년에는 바로 전 해에 훙서한 고종의 조카 이준용(李埈鎔)의 사우(祠宇)에 봉안할 영정을 그렸고, 이지용(李址鎔) 등 귀족들과 함께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며 교류의 폭을 넓혔다.
이 해 말에 첫 부인인 이씨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그 이듬 해에는 기미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천주교인이 찍어낸 독립신문을 배포한 일로 서대문 감옥에 6개월 정도 투옥되었다.
1920년에 서화계의 중진과 신진화가들이 동원되어 새로 중건된 창덕궁 내전의 벽화를 제작한 사업에 참여하여 화려한 채색의 궁중장식화이자 부벽화(付壁畵)인 <백학도(白鶴圖)>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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