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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ning Gallery

Morning Gallery '극재 정점식'

by 핑쿠여니 2023.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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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재 정점식

대구 출신의 서양화가다. 1950년대부터 자연주의적 구상전통이 강한 대구화단에서 비구상의 추상화를 묵묵히 작업하면서 한국적 추상화의 한 경지를 개척했다. 또한 교육자로서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하고, 비평가로서도 추상회화의 이론을 구축하며 대구 추상화의 정착과 개화를 이끌었다. 대표작으로 「카리아티드」 연작과 「부덕을 위한 비」 등이 있다.

1917년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에서 태어났다. 대구 남성로 약전골목에서 한의사를 하던 고모부에게서 한학과 서예를 배웠고,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1925년 대구 해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33년 대성학원 문과에 들어가 수학했다. 1937년 무렵 근처 선배 예술인들의 화실에 드나들며 김용조, 서동진, 서진달, 박재봉, 이인성 등의 영향을 받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38년 『조선민보』에서 주최한 남조선 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써 화가로 데뷔했다. 이후 대구미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8년 일본 교토회화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입체주의나 초현실주의 같은 서구 미술사조를 접했다. 재학 중 일본 독립전에 참여했고, 1939년 대구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다. 1941년 일본 교토회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경제적 곤경과 전쟁을 피해 삼촌이 있는 만주 하얼빈으로 건너갔다. 하얼빈에서 조선인 교포를 위해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하얼빈에서 일본 문화학원의 교수인 쓰다 세이슈(律田正周)를 만났다. 광복 후 정점선은 쓰다 세이슈와 3개월간 함께 지내는데, 이때 쓰다 세이슈와의 대화를 통해 미술을 보는 안목을 키웠다. 하얼빈에서 정점식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와 같이 만주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관전인 만주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고 재야에서 치러지는 만주미술가협회전에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 작품으로 「고가(古家)」가 있다. 「고가」는 국권을 상실한 민족의 고난을 어두운 색조의 풍경으로 표현했다.


광복 이후 1946년 대구로 돌아왔지만, 당시 현실타협적인 대구 화단과는 거리를 두고 작품활동을 펼쳤다. 정점식의 회화가 점차 구상화에서 멀어지고 비구상과 반추상으로 기울어진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화가단에 소속되어 『전선문학』 등 종군작가 기관지에 글을 쓰거나 삽화를 그렸다. 이때 「저회하는 자아도취」를 발표하며 현역 대가들의 안일한 작품세계를 비판했다. 1952년 경상북도 선산군 오상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했고, 상고예술학원 강사 및 대구문리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했다. 1953년 대구 미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토르소」, 「계성고 풍경」 등 비구상적이고 반추상적인 표현주의 작품을 전시했다. 정점식의 개인전은 당시 대구 화단에 추상미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계기였다. 1955년 대구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역임했다. 대구미술가협회는 지역화단의 열등감을 해소하고 자기부정과 혁신을 통해 구태의연한 대구화단의 구상주의를 쇄신하고자 했다. 1959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2년 대구 미공보원에서 주최한 ‘현대작가자선작품전’에 미국 화가인 모리스 그레이브스와 라이오닐 파이닝과 함께 공동 전시회를 가졌다.

1964년 대구 계명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83년에 퇴임했다. 미술공예과(1964~1977)를 출범시키고, 예술대학교 미술학부(1978~1980)로 승격, 다시 미술대학(1980~1983)으로 자리 잡고 성장하기까지 계명대학교 미술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고 체계화했다. 1960년대 정점식의 그림은 반구상에서 비구상으로 전환하는데 「카리아티드」 연작과 「부덕을 위한 비」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두 계열의 작품 모두 그리스의 역사적 소재를 차용하여 한국전쟁 이후 피폐해진 한국 여성들의 삶을 그렸다. 「부덕을 위한 비」는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있는 형상을 추상화한 작품으로 두 사람의 형상을 통해 그 이상의 비가시적인 세계를 창출하는 비구상화다.


계명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작품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정점식의 화가로서의 전성기는 퇴임 후인 1980년대부터였다. 1981년 대구 계명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샘 프랜시스전’을 유치하면서 순수 추상표현주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정점식은 서체추상화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후 평생 대구화단을 지키며 추상미술의 번창에 혼신을 다했다.

1981년 『아트로포스의 가위』를 출간한 이후 『현실과 허상』(1985), 『선택의 지혜』(1993), 『화가의 수적』(2002) 등 4권의 비평집을 발표하며 한국 화단에서는 보기 드문 학구적인 화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1991년에 발표한 <밤의 노래>가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PIFF) 공식 포스터의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2009년 타계했다. 계명대학교에 정점식의 흉상과 함께 극재미술관이 있다

츨처 지역N문화

극재 정점식 -홈페이지 http://jungjeumsik.com/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07/22/BF6JNEVJLJC63N2IPFHTZOBH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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